저녁밥 먹기 전, 집안 공기가 팽팽해지는 순간이 있다.
지우개가 안 지워진다고, 젓가락이 자꾸 미끄러진다고, 별것도 아닌 일에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그럼 나도 목소리가 딱딱해진다. “그게 화낼 일이야?” 이 한마디가 얼마나 자주 튀어나왔는지 모른다. 초등 아이 감정조절이라는 걸 나는 오랫동안 아이 혼자 배워야 하는 걸로 여겼던 것 같다. 나는 그냥 옆에서 뚝 그치라고 하면 되는 줄 알았고.
화날 일이 아니라는 그 말이 왜 안 통했나
돌이켜보면 나는 늘 순서가 급했다. 아이가 화를 내면 원인부터 따졌다. “왜 화가 나. 그럴 일이야? 그냥 다시 하면 되잖아.”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할수록 아이는 더 커졌다. 지우개를 던지거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거나. 나는 아이가 유난스럽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감정을 다루는 부모 유형에 대한 글을 읽게 됐다. 가족치료를 오래 연구한 존 가트맨이 부모를 네 유형으로 나눴는데, 그중 아이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아예 꾸짖어버리는 방식이 있더라. 감정을 인정받기 전에 지적이 먼저 나오면 아이는 방어부터 한다는 대목에서 좀 멈칫했다. 딱 나였다. “화날 일 아니야”는 아이 입장에선 ‘네 감정은 틀렸어’로 들렸을 거다. 그러니 진정되기는커녕 억울함이 하나 더 얹혔던 거고.

뚝 그치라는 말 대신 이름을 붙여줬더니
방법을 바꾼 계기는 거창하지 않았다. “울지 마” 말고 다르게 말해보자, 딱 그 정도였다.
어느 날 아이가 만들던 블록이 자꾸 무너지자 또 얼굴이 벌게졌다. 예전 같으면 “그거 갖고 왜 그래”가 나왔을 텐데, 그날은 그냥 이렇게 말했다. “잘 만들고 싶었는데 자꾸 무너져서 진짜 속상하지.” 그랬더니 아이가 울먹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지르던 게 딱 멈췄다. 벙찐 쪽은 오히려 나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게 그냥 착한 말이 아니었다. UCLA의 한 연구팀이 사람들에게 강한 감정이 담긴 표정을 보여주면서 그 감정에 ‘화남’, ‘무서움’ 같은 이름을 붙이게 했더니, 뇌에서 경보를 울리는 편도체 활동이 줄고 이성을 담당하는 앞쪽 뇌가 켜지는 게 확인됐다더라. 감정에 말로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정이 가라앉는다는 거다. 정신과 의사 대니얼 시겔은 이걸 “이름을 붙여야 다스릴 수 있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김영훈 교수의 칼럼에서도 아이가 폭발할 때 감정을 대신 언어로 표현해주라고 짚는다. “장난감을 안 사줘서 화가 났구나” 이런 식으로. 이성을 담당하는 앞쪽 뇌는 스무 살 중반까지도 공사 중이라, 초등 아이가 감정을 바로 못 누르는 건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아직 다 안 자란 거라는 얘기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다 받아주면 버릇 나빠지는 거 아닐까 했는데
솔직히 여기서 걸렸다. 감정을 다 읽어주면 애가 응석받이 되는 거 아닌가. 화내면 다 받아준다고 학습하는 거 아닌가.
아니었다. 감정코칭은 무조건 다 받아주기가 아니더라. 핵심은 감정은 모두 받아주되 행동에는 선을 긋는 거였다. 이게 나눠 생각하니까 훨씬 편했다.
그래서 요즘은 두 단계로 나눈다. 먼저 감정에 이름을 붙여준다. “안 돼서 진짜 속상했구나.” 그다음에 행동만 정확히 짚는다. “그래도 물건 던지는 건 안 돼. 화날 땐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말해볼래?” 속상한 마음은 인정하지만 던지는 행동은 안 된다는 걸 분리하는 거다.
거창한 5단계 같은 건 아직도 잘 못 외운다. 그냥 집에서는 이 정도만 챙긴다.
| 예전 나 | 바꾼 뒤 |
|---|---|
| “그게 화낼 일이야?” | “속상했구나” 먼저 |
| 원인부터 따짐 | 감정 인정 다음에 행동 짚기 |
| 빨리 그치게 하려고 함 | 가라앉을 시간을 줌 |
물론 매번 이렇게 우아하게 되는 건 아니다. 나도 피곤한 날은 그냥 “아 좀!” 하고 만다. 그날 밤엔 좀 미안해지고. 사실 아이 감정보다 내 감정부터 못 다스릴 때가 더 많다. 아이는 결국 내가 화를 다루는 걸 보고 배운다는데, 그 대목에선 늘 뜨끔하다. 이건 우리 집 아이 친구관계를 지켜보던 때랑도 비슷하다. 결국 아이를 고치려 들기 전에 내가 지켜보는 각도부터 바꿔야 했다.

몇 번 해봤는데 안 바뀌더라는 조급함에게
바꾼 지 얼마 안 됐을 때, 며칠 해봤는데 왜 그대로냐고 조급해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감정조절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연습으로 자라는 능력이라더라. 학교에서도 사회정서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걸 가르친다니, 집에서 몇 번 했다고 뚝딱 될 리가 없는 거였다. 오래 걸리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아직도 저녁 무렵 공기가 팽팽해지는 날은 있다. 다만 이제는 “뚝 그쳐”가 먼저 나오진 않는다. 그 정도면 나도 조금은 자란 거겠지.
속상한 건 속상한 거야. 던지지만 말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