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띠 따면 그때 그만두면 되죠.”
작년 봄쯤이었나. 태권도 관장님이 상담 끝에 지나가듯 한 말이었다. 그땐 그냥 흘려들었는데, 요즘 저녁마다 도복이랑 피아노 가방을 챙기는 아이를 보다가 그 문장이 자꾸 떠오른다. 검은띠 따면 그만. 그럼 피아노는? 미술은? 초등 예체능 학원, 대체 언제까지 시켜야 하나. 이 말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겠는데 며칠째 머릿속에서 굴러다닌다.
그 한 문장을 붙들고 다른 걸 세어봤다
관장님 말이 걸린 건 ‘끝나는 지점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안이 돼서였다. 국어 수학은 끝이 없는데, 예체능은 어딘가 마침표가 있다는 거잖아.
그래서 종이에 우리 아이 학원을 죽 적어봤다. 태권도, 피아노, 미술. 셋 다 예체능이다. 이게 남들도 그런가 싶어 찾아보니, 통계청 사교육비조사에 따르면 예체능 사교육을 시키는 목적으로 ‘취미·교양·재능계발’이 63.2%로 가장 높았다. 국·영·수가 ‘학교 수업 보충’인 것과는 결이 다르다. 그러니까 성적 때문에 보내는 게 아니라 그냥 좋으라고 보내는 거다. 그래서 더 쉽게 흔들리는 거였구나. 뺄까 말까가 국·영·수보다 훨씬 쉽게 올라오는 이유.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초등학생 사교육 참여율이 84%대라는 걸 보고는 또 마음이 반대로 갔다. 다들 시키는데 우리만 빼도 되나. 위안받았다가 다시 불안해지는 데 5분도 안 걸렸다.

학년으로 끊으려다 말았다
처음엔 ‘4학년 되면 하나 뺀다’ 이렇게 학년으로 선을 그으려고 했다. 실제로 많이들 그렇게 한다더라. 저학년엔 예체능 위주로 돌리다가 3~4학년쯤 영어 수학을 본격적으로 넣기 시작하고, 고학년 되면 예체능은 하나만 남기거나 정리하는 흐름. 커뮤니티를 봐도 피아노는 초등 3~4학년, 미술도 그 언저리에서 끊는 집이 많았다.
왜 하필 4학년이냐면, 이 시기에 수학이 훅 어려워진다. 분수 소수 덧셈뺄셈, 각도, 그래프 같은 게 나오면서 추상도가 확 올라간다는 것이다. 예체능에 쓰던 시간이랑 체력을 학업 쪽으로 당겨와야 하는 물리적인 압박이 이때 온다. 참, 세금 얘기도 하나 걸렸는데 태권도 미술 피아노 학원비는 유치원 때는 교육비 세액공제가 됐지만 초등학교 들어가면 공제 대상에서 빠진다고 알려져 있다(세법은 바뀔 수 있으니 확인은 필요하다). 초등 예체능은 오롯이 자비인 셈이다.
이쯤 정리하면 ‘4학년, 학원비, 학업 압박’ 딱 떨어지는데. 막상 아이한테 대입해보니 안 맞았다. 우리 아이는 피아노는 시큰둥한데 태권도 가는 날은 아침부터 신나 있다. 미술은 일주일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학년으로 뭉텅 자르면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걸 자르게 될 수도 있는 거였다. 기준을 학년에 두는 게 아니라는 걸 여기서 알았다.
하나쯤은 오래 붙들게 두기로
그래서 축을 바꿔봤다. 학년 말고, 아이가 좋아하는지, 단계가 쌓이는 종목인지, 시간 체력이 되는지, 그리고 눈에 보이는 마침표가 있는지.
악기나 운동처럼 단계가 차곡차곡 쌓이는 건 중간에 끊으면 다시 기초부터라 아깝다는 조언이 반복됐다. 반대로 흥미가 뚜렷하지 않으면 정리해도 된다는 거고. 그리고 오래 붙든 예체능 하나가 성적표에 안 잡히는 걸 남긴다는 얘기도 여럿 봤다. 학부모 커뮤니티 글에서는 연습의 지루함을 넘어 결국 해내는 경험이 자존감을 키운다고 했고, 그릿 관련 학술 자료에서도 한 가지를 오래 붙드는 끈기가 삶 전반의 만족도에 긍정적이라는 연구가 반복 보고된다더라. 읽고 나서야, 관장님이 왜 ‘검은띠까지’라고 선을 그어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만두는 게 아니라 해냈다로 남기는 마침표.
그만두는 것도 그냥 관두는 게 아니라 발표회 한 번, 검은띠 하나, 작품집 한 권 같은 마디를 찍고 마무리하면 좋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 태권도는 그 서사가 이미 깔려 있는 셈이다. 검은띠라는 졸업식이 예약돼 있으니까.
자, 그럼 다 정했다 싶었는데. 아니다, 정작 아이한테는 아직 아무것도 안 물어봤다. 종이에 적고 통계 뒤지고 나 혼자 축을 세 개나 세웠으면서, 정작 셋 중 뭘 제일 오래 하고 싶은지는 아이한테 안 물어봤더라. 순서가 나부터였다.
기준을 다 세워놓고도 제일 먼저 할 걸 빼먹었다. 오늘 저녁엔 종이 대신 아이한테 먼저 물어봐야겠다.